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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by 지금 여기 깨어있기 2022. 7. 28.

우리는 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헤매고 살까? 왜 온갖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까? 그의 근본은 [무지], 알지 못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왜 알지 못하는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머리에 양동이를 하나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뭐만 보일까? 양동이만 보이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의 울타리 안으로만 인식하게 된다. 내가 아는 것과 진실이 다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말이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왜곡되어 들린다. '자기 식으로 듣는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이는 눈이 있어도 보이는 게 없고 귀가 있어도 듣는 게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면 양동이를 벗어야 가능한 것이다.

 

내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깨달으면 모든 사람과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상대가 깨달으면 그 사람한테만 해당되지 다른 사람하고는 부딪히는게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은 수없이 많으며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을 접하기 때문에 한 명의 깨달은 자 옆에 내가 있는 것이 나한테는 큰 이익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깨닫는 게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깨닫고 못 깨닫고는 큰 관계가 없다. 나를 위해서 상대방이 깨달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도 깨달으면 좋다. 상대가 깨닫는게 나한데 아무 손해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전법]이다. 내가 괴로울 때를 생각해 봤을 때 그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겠는가, 그러니 그에게 양동이를 벗으라고 안내를 해준다. 그것은 나에게도 또한 이익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행복하고 자유롭기, 다음으로 행복 전하기. 내 깨닫고 그도 깨닫기. 이 불교는 내가 깨닫는 것이 근본이다.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깨닫게 되면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일어난다. '저 사람들도 이 법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전법은 어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내 인기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비심, 연민]에 의해서 가능하다. 나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지혜라면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해주는 전법은 연민, 자비에서 일어난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이유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중생의 자연스러운 정신현상이다. 모든 사물을 자기중심에 놓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인식하는 거고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위치,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식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인식이 서로 달라고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이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자기의 인식 하에 모든 것을 평가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물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특징이다. 내가 그렇듯이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나의 인식은 상대적인 것을 알면 되는데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시킨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빠졌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진실을 보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 안다는 생각, 다 모른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부처님이 와도 깨닫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다 안다'는 사람이다. 그래서 병중에 제일 큰 병이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다 안다'는 '안다병'에 걸린 사람이다. 

이것과 동격인 또 하나의 병이 '모른다병'이다. "아휴, 난 몰라". 어떤 얘길 해도  "아휴, 난 몰라" 이런 사람이다. 사로잡힘 중에도 가장 강한 상태일 때 안다병이나 모른다병이 나타난다. 그래서 안다병, 모른다병은 적어도 놔야 한다.

내가 비록 아는 것 같아도 그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모른다면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두가지 병은 모두 듣기 싫다는 것, 둘 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을 깨닫고 감동한 사람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를 다음 네가지로 비유를 들어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였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이렇게 찬탄을 하면서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고 덮인 것을 벗겨내어 보여주심과 같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주심과 같고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추어주심과 같다" 네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고통에서 우리를 구제하는 가르침, 불교

스스로 눈을 떠서 무지에서 깨어나면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또 딴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그렇지 않다 해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스스로 내가 그 모순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불교라고 하는 것은 내가 겪고 있는 이 괴로움과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읻다. 그것은 무지로부터 깨어나면 극복이 된다. 이렇게 우리를 고통에서 구제하는 가르침이 불교다. <법륜스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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