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열반과 해탈을 목표로 한다. 열반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지고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의미로 해탈, 즉 걸림이 없는 상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마음에 아무런 걸림, 속박이 없는 상태, 무거운 짐이 전혀 없는 긴장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들 수 있을까?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어리석음,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향해 가는 데는 원리가 있다. 바로 고집멸도 사성제이다.
현재의 삶에 대한 진단, 고
현재의 자기 삶에 대한 진단을 먼저 해야 한다. 지금 자기가 가만히 자기 상태를 점검해 보니까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아니다. 마음이 기쁨으로 놓여있는 상태가 아니다.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다, 어디를 가도 눈치를 보고 속박 받고 있다.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어떤 의무감, 사명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내 맘대로 안 되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이런저런 근심과 걱정이 많고 괴롭다. 그러면 늘 괴롭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괴로워하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즐거울 때로 있다. 그러면 그 즐거움이 지속되느냐? 그렇지 않다. 이렇듯 고락이 교차한다. 이 고와 락이, 행과 불행이 돌고 도는 동전 양면처럼 이리 뒤집어졌다가 저리 뒤집어졌다가 한다. 그것을 우리는 자꾸 분리해서 따로따로 이건 버리고 이건 가지려고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수행을 하거나 명상을 할 때도 마음이 편안해질 때나 뭔가 장애가 있고 번뇌가 일어날 때 그 둘을 같이 평등하게 보는 마음이 명상인데 다리가 좀 아프면 명상이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리가 안 아프고 죽비소리가 금방 끝나는 것 같으면 명상이 잘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고락을 떠나는 참행복을 구하면서도 늘 고락 가운데 있는 행복과 동일시해서 거기에 집착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고한 행복인 열반은 우리가 말하는 행, 불행중의 하나인 행이 아니다. 행, 불행의 근본 뿌리인 욕구, 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해서 또한 욕구를 놓아버림으로 해서 얻어지는 무사 안온의 마음 상태를 말한다.
불교의 사성제에서 '인생은 고다' 하는 것은 '인생은 고락이 윤회하는 삶이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고락으로부터 한발 물러날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락을 고로 보는 눈이 없다. '인생은 고락이 윤회하는 삶이다' 라는 말이다. 우리는 고락으로부터 한발 물러날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락을 고로 보는 눈이 없다. 이에 반해 부처님께선 '채색된 항아리에 똥이 가득 담겼다"라고 하셨다. '락의 실상은 고'인 것이다. 락의 실상이 고라는 것을 꿰뚫어 안다면 락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을 조금만 관찰하고 주시해 보면 락이라는 미끼가 바로 다음의 큰 고를 불러오는 원인인 것이다.
고의 원인인 욕망, 집
부처님도 젊은 시절에는 락을 추구했다.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다. 쾌락주의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질수 없음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욕망의 끝없이 커지는 성질을 알게 되었다. 더 큰 불꽃은 더 많은 장작을 요구하듯이.
그래서 이 욕망의 씨를 말려 버려야 된다, 욕망의 싹을 잘라 버려야 된다, 이 욕망을 억제하고 억압해서 없애는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행복에 이르고자 하는 고행주의를 따랐다. 먹고 자는 것을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로 최소화했다. 죽기 전까지,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그런 것을 최소화했는 데로 역시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했다.
쾌락과 고행의 끝을 가보면서 '돌아봄'이 생겼다. 그 돌아봄을 통해서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 욕망에 매인 것이 아니고 욕망을 억압라는 것도 욕망에 매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둘은 모두 결국 욕망으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 욕망의 소멸, 멸
그래서 제 3의제3의 길,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는 길, 그 둘의 어디도 아니다, 그 둘을 떠났다 해서 [중도]라고 말한다. 중도란 것은 중간이란 뜻이 아니다. 그 둘을 떠난 제3의 길이다.
욕망이 일어날 때 '욕망이 일어나구나'하고 알아차릴 뿐 욕망을 채우기 위해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서 참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는 '알아차림'. 알아차리는데 그다음에 욕망에 끌려갈 수도 있다.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된다.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찰나, 찰나, 찰나를 지속한다. 이것을 [지켜보기]라고 한다. 그러면 이것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래서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유지됨을 지켜보고 사라짐을 알아차리고 그러면 거기 대응을 안 해도 된다.
중도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정해놓을 수가 없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고 한다. 정함이 없는 법이다. 이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중도는 목표를 달성시키는 최선의 길인데 그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치에 따라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에 '부처님은 지혜와 방편이 자유자재하다'라고 말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 소멸의 방법, 도
괴로움은 현실인데 괴로움의 원인은 집이다. 이 원인이 만약에 소멸된다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이 원인을 소멸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방법이다. 이것을 우리는 [도]라고 한다. 중도의 행을 해야 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여덟가지 바른길, [팔정도]를 행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다섯 명의 옛날 친구들을 만나서 첫 번째 설법을 했다. 법문을 처음으로 설함으로 해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게 된 것이다. 처음 설법한 내용이 중도, 사성제, 그리고 팔정도이다. 이 법문을 듣고 다섯 옛 친구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들 또한 깨달은 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붓다'라고 부르지 않고 '아라한'이라고 불렀다. 아라한이란 '모든 고뇌가 사라진 자'라는 뜻으로 부처님도 아라한이다.
스스로 깨달은 이는 '붓다'라고 부르고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는 깨달은 자의 명칭 가운데 하나인 '아라한'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런 아라한들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스스로 깨달은 이를 '붓다',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개 해주는 가르침을 '담마', 담마를 듣고 깨달은 이들은 '상가'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보배로 여길만하고 의지할만하다 해서 '삼보'라고 부른다. <법륜스님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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