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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치관 오계, 제 1 계 불살생

by 지금 여기 깨어있기 2022. 8. 6.

불자라고 하면 마땅히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켜야 한다. 부처님의 첫 번째 재가 신자가 된 구리가 장자 부부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아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법의 이치를 알고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했다.

심보에 귀의 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 믿음이 된다. 그리고 오계를 지키는 것은 실천이 된다. 불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실천, 행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삼귀의와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마라, 불살생

살아 있는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게 특징이다. 즉 죽기를 싫어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도 살고자 하기 때문에 이 불살생 계율은 살인하지 말라가 아니라 살생하지 말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 만큼 절대적이라고 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절대화 시켜서는 안 된다.

부처님 본생담 중 '매와 비둘기 이야기'는 가장 미물로서의 비둘기와 가장 위대한 가치로서의 보디사트바 마저도 생명의 무게는 같다는 것을 말한다. 작은 생명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볼 때는 비둘기 같은 것은 하찮은 생명이지만 그 비둘기에게는 자신이 가장 소중한 생명이다. 여기서 생명의 무게는 모든 생명이 다 똑같다는 것을 말한다.

 

불살생계의 실천

  1. 내가 죽여서는 안 된다 : 이것은 타인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위해서 죽이지 말라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죽이지 말아야 한다. 그 생명을 위해서도 해치지 말아야 하지마는 인연의 과보로 나에게 돌아올 나쁜 과보를 생각한다면 이것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은 없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도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자라면 함주로 살생을 하지 않는다.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큰 과보를 받는다. 그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도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
  2.  남을 시켜서 해쳐도 안 된다 : 내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남을 시켜서 헤쳐도 안 된다.
  3.  수단을 써서 해쳐도 안 된다 : 수다을 써서 해친다는 것은 살생을 조장하는 것이다. 무기를 제조하거나 무기를 보관하거나 무기를 판매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는 모두 살생을 조장하는 행위에 속한다.
  4. 살생하는 것을 보고 즐기지 말라.
  5. 살생을 방관하지 마라 : 물에 빠져서 죽는 것을 보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땅히 내가 할 수 있다면 구해야 한다.
  6. 폭력을 사용하지 마라 :  살생까지는 아니지만 이와 동일한 것이 폭력이다. 고문도 여기에 들어간다. 부부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7. 환경을 오염시키지 마라 : 더 크게 보면 오늘날 환경 파괴하는 것도 1번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강을 파헤치거나 오염물질을 내보내거나 하는 것도 도가 지나치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다 살고자 한다. 그 삶의 터전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시절 인연에 따른 적용

불교적 가치라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교리적인 모순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것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 특정한 분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두루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가 비록 다 같고 사람 아니라 모든 생명을 다 똑같이 한다 하더라도 무유정법 같이 시절 인연을 따라서 우선 사람에게 먼저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과보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보디사트바의 행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다. 그래서 내가 호랑이를 죽였다 하면 이는 살생이 된다.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는데 다음에 옆집 사람을 또 물어 죽이려고 한다, 놔두면 여러 사람을 해친다, 그래서 내가 호랑이를 죽였다면 이것도 살생이긴 하지만 전자와는 다르다. 이것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다.

그러나 살생은 살생이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는 살생의 과보를 기꺼이 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내가 다음 생에 두 번, 세 번, 단명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생명을 내가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보드사트바의 행이다.

 

살생을 유발하는 요인으로서 음식(고기)

고기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에서부터 나중에 고기를 먹지 말라는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음식으로서의 고기와 살생은 다르다.

그러나 음식으로서의 고기가 살생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있다. 맛에 집착할 때 그런 일이 생긴다. 그래서 맛에 집착해서 먹지 말라는 계율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안 먹으면 좋지만 어쩔 수 없이 먹었다면 음식 수준을 넘어서는 안 된다. 맛에 집착해서 가려 먹지 말라는 의미다. 자꾸 가려 먹게 되면 결국 살생을 조장하게 된다.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는데 부정육은 먹지 말라고 되어 있다. 직접 잡아먹은 것, 남을 시켜서 잡은 것, 살생하는 장면이나 비명소리를 들은 고기를 먹지 말 것, 이것은 마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 살생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 육식을 금하게 된 배경

불교는 채식을 주로 하되 채식주의는 아니다. 대승불교에 오면서 스님들이 지위가 높아지고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음식을 일부러 만들어서 대접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접을 하다 보니 고기를 찾게 되고 그럼에 따라 대승불교에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 강조된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것이다.

다른 배경으로 브라만교, 힌두교에서 브라만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힌두교에서 사제들은 채식주의자이다. 인도 불교가 힌두적 영향을 받아서 고기를 먹지 않는 계율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적 영향으로 중국, 한국, 일본. 이 대승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절대 금기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나 정신적인 면, 환경적인 면을 고려하면 채식을 하는 것이 좋다.  <법륜스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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