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불교의 우주관, 삼계육도와 삼도

by 지금 여기 깨어있기 2022. 7. 7.

부처님께서 우주에 대해 직접 설하신 적은 없다. 오늘날 불교의 우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인도 사회 인도인들의 우주관이다. 당시 인도 사회의 우주관이 불법에 어긋나지 않아 그대로 불교에 수용된 것이다.

인도 우주관의 특징은 우주는 무한하다는 것이다. 이 넓은 세계에는 지구 같은 세계가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량없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들은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성주괴공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무한한 우주, 무한한 세계를 처음부터 용인하고 있다.

예불문 중 [삼계도사]의 [삼계]가 불교의 우주관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삼계육도

삼계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로 나뉜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 몸의 형상도 있고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다. 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6계로 나뉜다.

[색계]는 몸의 형상은 있지만 욕망은 없는 세계이다.

[무색계]는 몸의 형상도 없는 순수한 정신세계이다.

 

[욕계] 

지옥은 가장 열악하고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세계이다. 아귀는 먹을 것이 없어서 기아에 허덕이는 세계이고 축생은 어리석음, 무지의 세계이다. 즉 쥐가 쥐약을 먹고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은 세계이다.

아수라 또는 수라는 화를 잘 내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세계이다. 인간은 인간 세계를 말하고 천상은 살기 좋은 세계이다.

육도(지옥, 아귀, 출생, 아수라, 인간, 천상)는 한 번 가면 영원히 있는 게 아니라 돌고 돈다. 복을 지으면 천상에 가고 복이 다하면 다시 지옥에 떨어지고 죄를 다 갚으면 올라가는 윤회하는 세계이다. 육도윤회라고 한다. 이는 전통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 이야기하는 개념이다.

수행적 관점에서 육도를 본다면 욕구가 다 충족되면 [천상], 때로는 충족되고 때로는 충족이 안되면 [인간], 욕구 충족이 안되어 매일 싸우고 난리를 피우면 [수라], 바보같이 자기 발등 찍는 식으로 살면 [축생], 배가 고파서 욕구에 헐떡거리면 [아귀], 욕구가 하나도 만족이 안 되어 괴로우면 [지옥]인 것이다.

 

[천상]도 인간 세계에서 가까운 [사왕천]부터 [도리천], [야먀천], [도솔천], [화락촌], [타화자재천]으로 나뉜다. 타화자재천이 욕계 천상 가운데 가장 위에 있다. 천상 중에도 타화자재천이 지옥의 정반대이다.

타화자재천왕은 모든 욕계의 중생들이 최고로 부러워하는 자리지만 집착을 가져오기 때문에 해탈에 있어서는 가장 큰 장애이므로 경전에서 는 마왕이라 불린다. 기독교에서의 사탄과는 다른 개념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천상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즉 해탈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옥, 아귀, 축생을 [삼악도], 수라, 인간, 천상을 [삼선도]라고 한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를 사취(사악취)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인간과 천상의 모든 굴레로 벗어났다'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천상은 [여섯 가지 천상, 욕계육천]이라고 부른다.

절에 들어갈 때, 일주문을 지나서 들어가면 첫 번째 천상이 사왕천이다. 사왕천에는 동서남북으로 [동방지국천왕], [서방광목천왕], [남방중장천왕], [북방다문천왕]. 4명의 천왕과 그 아래 8명의 신, 팔부신장이 있다.

 

색계

욕심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욕심이 없다고 해탈하는 것은 아니다. 욕심이 없는 세계는 다 천상에 속하는데 거기에는 18개의 천상이 있다.

 

무색계

비상비비상처천, 무소유처전, 식무변처천, 공무변처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생과 삼도

사생은 모든 생명을 태어나는 모습으로 태생, 난생, 습생, 화생으로 나뉜다.

태생은 사람이나 소, 개, 등 태로 태어난 것, 포유류이다.

난생은 알로 태어난 것, 조류, 파충류, 양서류가 이에 속한다.

습생은 습한 곳, 물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곤충류가 이에 속하는데 지금으로 보면 난생에 속한다.

화생은 암수 구분 없이 세포 분열을 하듯이 태어나는 것이다. 예불문 '사생자부'란 부처님은 모든 중생의 자비로운 어버이라는 뜻이다.

[삼도]는 견도, 수도, 무학도이다. 진실에 대한 바른 이해, 진라를 보는 눈[견도]이 열려야 하고, 깨어있다 해도 찰나 무지가 일어나므로 연습을 꾸준히 해서 그 습관을 버려야 한다. 알아차리고 뉘우치고 다짐하는 것[수도]을 꾸준히 해나가야 하며, 이렇게 해서 습관이 없어지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어진다 [무학도]. 견도가 열린 단계에 이른 자를 [수다원], 다음에 [사다함], [아나함], 무학도에 이른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 제6식인 의식의 어리석음은 깨우칠 수 있지만, 무의식의 습관은 바꾸기 어렵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찰나에 깨어있지 못하면 찰나 무지가 일어난다. 찰나 무지가 일어나면 자각하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깨어있는 것이 수행의 과정이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법륜스님 법문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