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세계관이란 연기적 관점에서 인식을 하는 것이다. 남을 위한 일은 결과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너에게 복이 되는 것이 곧 나에게 복이 된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된다. 연기적 관점에서 [자리이타], 그러므로 너와 내가 함께 해탈에 이른다 [자타일시 성불도]는 관점을 갖고 있다.
불교는 그 믿음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인식의 범위 안에서는 합리성을 갖고 있고 그 다음에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는 가르침을 갖고 있다. 여기에 해탈이 있다.
불교의 인식방법
- 불교의 세계관 : 세계는 단독자의 집합이 아니라 그물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질적으로 양적으로 끝없이 변화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세계를 연기적 세계관으로 이해함으로 오늘날 환경문제를 근원적이며 철학적으로 풀 수가 있다. 이 세계는 서로 상호 연관되어서 존재하게 된다. 오늘날 인류는 세계의 질서, 균형과 조화를 깨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혼란이 온 것이다.
- 불교의 인간관 :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불교의 인간관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로 행동하고 분별하지만 여기에는 이렇게 하지만 여기에는 그 어디에도 자아라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 불교의 해탈관 : 진실에 대한 무지가 고를 만들고 진실을 바로 보면 고가 사라진다. 어떻게 하면 무지를 깨뜨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 정진하면 해탈할 수 있다.
- 불교의 윤리 도덕관 :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불살생], 다른 이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불투도],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고 [불사음], 다른 이를 속이지 않는 것 [불망어]이 기본적인 것이다. 이는 타인과 내가 공존하는 길이다.
삶이란 습관의 흐름이며 업의 작용
살아간다는 것은 습관의 반복, 연속이다. 불교의 표현으로는 업의 작용이다. 우리의 삶이란 업의 흐름이다. 이를 [까르마, 업식]이라고 한다.
사물을 알아차린다, 본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는 업식이 작용한다. 모든 존재는 그 물질과 용도에 따른 이름인 [명색]으로 이루어진다.
인도 힌두교에서의 까르마와 불교의 까르마는 의미가 다르다.
힌두교에서의 까르마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다. 절대자의 의해 운명 지어졌거나, 사주팔자에 정해져 있거나, 전생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는 숙명론적 관점에 놓여 있다.
불교에서의 까르마는 형성된 것이므로 소멸될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살아온 습관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도 있다. 습관이 굳어서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제행무상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업은 실체가 없다고 하셨다. 이렇듯 같은 용어를 써도 힌두교와 불교에서 쓰는 용어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업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행]이라고 하고, [제행무상]이라고 할 때는 업의 소멸 가능성을 강조한다.
어떤 것이 습관이 되면, 그에 의해 욕구가 일어나고, 욕구를 따라 계속 행동하다 보면 습관이 더욱 축적되어 거기서 다시 욕구가 일어나 반복된다.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작은 변화들이 있다.
업에는 선업과 악업,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닌 것이 있지만,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이 있을 뿐이다.
해탈의 관점에서는 나쁜 습관뿐만 아니라 좋은 습관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업이 바뀐다는 것은 운명이 바뀐다는 것이며, 내가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법륜스님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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