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깨닫는가? 법의 실상을 깨닫는다. 여기서 '법'이란 존재, 이 세상에 내재해 있는 모든 존재들을 말한다.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것, 여기서 '실상'이란 '참모습'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차린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을 모르는 것을 '무지'라 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지혜'라 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
존재의 참모습,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아차리면 두려움, 괴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이 '실상'은 자연현상, 물질 현상뿐만 아니라 생명현상, 정신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연구대상이 자연현상, 물질 현상이라면 불교는 그 연구대상이 마음,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을 아는 것, 깨달음
'있는 그대로 본다, 깨닫는다'의 대상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실제 내가 그것의 진실을 알든 모르든 실상(진실)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안다, 내가 모른다의 차이밖에 없다.
깨달음이란 내가 그 실상을 모르다가 그 실상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가려진 것을 벗겨내서 보는 것과 같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은 ;눈을 떳다', '바르게 알았다'하여 [정견]이라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조견]이라고 쓰고 팔정도에서는 [정견]이라고 한다. 한문으로는 [관]이라고 쓴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는 말이 있다.
'관자재보살'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자유자재한 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다 볼 수 있는, 즉 '깨달은 자'이다.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아는 자, 고통을 고통으로 그대로 아는 자'라는 말이다.
깨달음에 이른 상태, 열반과 해탈
깨닫게 되면, 진실을 알게 되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즉 무지에서 깨어나게 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괴로움이 소멸된다, 두려움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인도말로 [니르바나], '니르바나에 이른다'라고 말한다. '니르바나'의 발음을 우리말로 하면 [열반]이라고 한다. 이를 번역하면 '멸'인데 괴로움이 멸해서 고요한 상태에 있다, 이것을 [적멸]이라고도 하는데 개념이 불분명하여 [열반]이라고 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속박을 받는다. 이런 데서 다 벗어난다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행복을 얻었다',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괴로움이란 행복의 반대되는 불행, 자유에 반대되는 속박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참 행복, 참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인데 [참 행복을 열반], [참자유를 해탈]이라고 한다.
참 행복(열반)의 의미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행복은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즉 행이 불행이 되고 불행이 다시 행이 되는 것. 행과 불행의 두 가지를 오고 가는 행.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이다. 이렇게 행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 돌고 돈다고 말한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것 중에 행,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행복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열반(참행복)에서 말하는 행복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 행이다. 제3의 다른 행복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용어를 같이 쓰기 때문에 헷갈리게 되어 이를 그냥 [열반]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행복해진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걸림이 없어진다,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들뜨거나 흥분되거나 두렵거나 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법륜스님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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